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랍 연맹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20세기에 들어서 아랍 지방에 [[아랍 민족주의]]가 고조되기 시작하면서 아랍 국가들 간의 지역 협력기구를 설립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이 시작되자 아랍 국가들이 [[추축국]] 측에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[[1941년]] [[5월 29일]] [[영국]]의 [[앤서니 이든]]이 주장해 1945년 3월 22일에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Alexandria_Protocol|알렉산드리아 의정서의 발효]]를 통해 아랍 7개국이 가맹하여 결성되었다. [[1963년]]부터 [[가말 압델 나세르]]의 제창에 의해 아랍 [[정상회담]]이 이루어지게 되었다. [[1982년]] 이후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[[2000년]]에 다시 재개하여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다. 정상회의는 1년에 한 번 회원국의 도시 중 한 곳에서 임의로 선발되어 이루어진다. 아랍 국가들이 점점 독립적인 노선을 가게 되면서 회원국 수 확대해 나갔는데 [[1973년]]에 [[모리타니]]가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당시까지는 아랍 국가로 간주되지 않았던 [[지부티]]와 [[소말리아]], [[코모로]] 등의 국가들이 회원국 지위를 취득하게 되었다. 이후 이집트의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(범아랍주의)에 근거하여 아랍 지방의 통일을 목표로 제창을 했지만, 기본적으로 이집트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, [[시리아]], [[이라크]] 등의 국가들은 아랍권에서 주도권을 잡으려하고 서로 종속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번번히 좌절되었다. [[중동전쟁]]에서 공동보조를 취하고 1967년 [[제3차 중동전쟁]]에서 아랍측이 대패하여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가 확립되었을 때 같은 해 9월 아랍 정상회의에서 아랍연맹은 이스라엘에 대해 '''"이스라엘과 평화도 없고, 협상도 없으며, 승인도 없다."'''라는 "3 No"원칙을 내세운다. 그러다가 1978년 3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맺어지는데, 이 합의에서 이집트의 [[사다트]] 대통령과 이스라엘 총리의 [[메나헴 베긴]] 사이에서 양국의 휴전과 상호 인정이 체결되어 아랍 연맹에 격진을 가져왔다. 아랍 연맹의 대이스라엘 공동정책인 "'이스라엘과 평화도 없고, 협상도 없으며, 승인도 없다."'의 원칙을 위반했다며 이집트를 강하게 비난했고, 다음 해 1979년에 이집트는 아랍 연맹의 주도국 지위에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아랍 연맹에서 추방되고 만다. 동시에 아랍 연맹의 본부도 튀니지의 [[튀니스]]로 이전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